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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에 녹아든 우리의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11-05
우수리스크의 한적한 도로변에 서 있는 4월 참변 추모탑에서 짧은 묵념을 마친 원정대의 모습이다. 방금 꺾어온 듯 싱싱한 하얀 국화 두 송이가 희생자를 추모하는 의미로 비석 아래 놓여있었고,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승리를 위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들의 업적은 영원하리라.’   ⓒ 김세은 기자


10월 24일, 경기도 중학생 역사원정대는 우수리스크 4월 참변 추모탑 방문으로 원정 이튿날을 시작했다. 1917년 일본은 러시아의 적백내전(1917~1922)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연해주로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적군의 강한 군사력으로 궁지에 빠지게 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한인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1920년 4월 4~5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우수리스크 등 한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을 습격해 신한촌 한민학교를 비롯한 수많은 가옥을 파괴하였고, 재판과정도 거치지 않고 독립운동가 300여 명과 민간인 2000여 명 이상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이를 ‘4월 참변’이라고 한다. 역사원정대는 4월 참변 추모비에 고개를 숙이고, 참변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최재형 생가로 걸어 들어가는 원정대원. 최재형 생가는 최재형이 1919년부터 1920년까지 일본헌병대에 의해 학살되기 전까지 거주했던 마지막 거처이다.   ⓒ 김세은 기자


4월 참변의 희생자 중에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최재형도 있었다. 최재형은 안중근 의거의 숨은 공로자이자 시베리아 항일운동의 대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사무총장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정거장에서 일본 군벌의 시조인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총살하여 세계 안목을 놀라게 하였다. 이 사변에 대한 재정, 권총, 기타가 모두 최재형의 재정이었다.” -러시아에서 항일 투쟁을 했던 이인섭의 글

조경원 가이드가 최재형의 일생과 업적을 설명하고 있다.   ⓒ 김세은 기자




최재형의 가옥에 남아있던 페치카의 원형을 복원해 전시한 것이다.   ⓒ 김세은 기자


노비 출신의 자산가였던 최재형의 애칭 ‘페치카’는 러시아어로 ‘난로’라는 의미이다. 그는 한인들에게 따뜻한 사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최재형은 러시아 관리들과 부역에 동원된 한인 간 중재자 역할을 하였는데, 차별받는 처지에 있어도 러시아어를 몰라 곤란을 겪던 한인들의 입장을 대변해 주었다. 그는 한인 자녀들을 위한 교육에 관심을 가져 40여 명의 학생을 러시아 도시의 학교로 유학 보냈다. 이들 중 김아파나시, 김미하일, 한명세, 오하묵, 최고려, 박일리야 등은 후일 러시아 한인사회에서 사회·정치적 지도자로 성장했다. 특히 권업회가 설립한 신한촌의 한민학교는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민족교육의 중추 기관으로 성장했다. 고려인들 사이 그의 인기가 대단해 집집마다 그의 사진이 걸려있었을 정도라고 한다.

원정대는 최재형 생가 앞 그의 흉상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최재형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흉상 옆에는 2019년 광복절에 세워진 기념비가 있다.  ⓒ 김세은 기자


최재형은 한인을 돕는 일 이외에도 의병 활동, 언론 활동, 교육사업, 권업회 등 다양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이러한 활동으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사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4월 7일, 최재형과 3명의 다른 인사들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탈출을 시도하다가 재판 없이 총격으로 순국하였다. 비록 그는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항일운동에 쏟은 노력과 한인들에게 보여준 따뜻함은 여전히 남아 따뜻한 등불처럼 빛나고 있다.

경기도 중학생 역사원정대가 발해 거북이 공원에서 조경원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다. 원정대는 “발해는 건국 시초와 문화를 모두 보아도 우리의 역사인데, 분쟁 때문에 비석을 없앴다는 것이 답답하다”, “나중에 우리 역사를 꼭 되찾고 인정받을 것이다” 등 소감을 나누었다.   ⓒ 김세은 기자


최재형 선생 고택 맞은편에는 우수리스크의 시민공원인 ‘발해 거북이 공원’(도라공원)이 있다. 이곳에는 발해 유물로 추정되는 거북이 형상 비좌가 유명하다. 러시아 정부에서 발해 역사에 대한 분쟁을 이유로 비신을 없앴기 때문에 거북이 위의 비좌가 휑하게 비어있다.

원정대가 안중근 의사 기념비에서 4조 염서윤 학생의 발표를 듣고 있다. 안중근 의사 기념비의 전면에는 ‘인류의 평화와 행복과 미래, 안중근 의사’라고 한글로 새겨져 있고 그 아래 안중근 의사의 약력이 나와 있다.   ⓒ 김세은 기자


다음으로 원정대는 안중근 의사 기념비와 고려인 문화센터를 방문했다. 문화센터에서는 연해주 한인 이주 지도를 보며 1864년 시작되어 일제강점기 이후까지 이어진 연해주 한인들의 역사를 공부했다.

원정대가 고려인문화센터에서 영상자료를 보며 고려인의 역사를 학습하고 있다.  ⓒ 김세은 기자


연해주는 러일전쟁, 을사늑약, 경술국치 등을 겪으면서 국외 독립운동의 중심지역으로 성장했다. 이 시기에 국내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연해주로 망명하여 13도의군, 국민회, 성명회, 권업회 등의 항일결사가 조직되었고 계동학교, 한민학교 등도 연해주에 다수 설립되었다.

원정대는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에서 그의 희생과 죽음을 기리는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 김세은 기자


마지막으로 독립운동을 진두지휘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를 찾았다. 그는 독립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며 자신을 화장하여 이곳 수이푼 강가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때 자신의 모든 소유물과 연구 자료를 함께 태워달라는 부탁을 하여 현재까지 연구에 난항을 겪고 있다. 3조 원정대원 노연우 학생은 이상설의 업적을 소개하며 “너른 벌판에 비석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어 사후에도 조국의 땅이 아닌 타국에 남겨진, 그리고 관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독립운동가의 안타까운 운명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라는 말로 발표를 마무리 지었다.

일정을 마친 후 워크북의 활동일지를 작성하고 있다. 워크북에는 준비물·일정·조별 역할분담·유적지 정보를 비롯해 사전·사후 과제와 활동일지가 실려 있다.   ⓒ 김세은 기자


경기도 중학생 역사원정대는 열차를 타고 우수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다. 숙소에 도착해서도 원정대는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1시간의 토론회를 했다. 각자 워크북을 작성하며 오늘 본 유적 중 인상 깊었던 곳과 그 이유를 조별로 정리해 발표하고, 과거 독립운동을 도울 방안을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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